[왕현지] 미국교환학생. 너무 값진 경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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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교환학생. 너무 값진 경험!
Savannah College of Art Design 합격 Faith Christian School (NC) 기독사립 Nelson County High School (VA) 미국교환 왕현지 1. 외고진학 실패로 우울하고 무기력했다 내가 ‘교환학생’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지역 도서관에서 책 정리 봉사활동을 하다가 한 중학생이 쓴 교환학생 수기를 읽게 되었다. 봉사활동 중이라 책을 읽으면 안 되어 봉사활동 시간 종료 후 책을 읽었다. 그 당시 나는 그 책을 읽고 부러움에 빠졌다. 미국 학교도 재미있어 보이고 이 아이는 나랑 나이도 비슷했다. 그 나이에 혼자 갔다는 사실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내가 가고 싶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다 왔다는 사실이 부러웠었다. 그 때부터 나는 엄마께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가고 싶다고 누누이 말해왔었다. 2014년,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외고 진학 실패로 나는 무기력과 우울감에 젖어있었고,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 또한 내 마음에 들지도 않았기에 학교를 싫어했었다. 그렇게 1학년 1학기를 엉망으로 보냈다. 성적이 마구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 만 못했다. 특히 수학을 놓게 되었다. 그러던 중 1학기 말에 나는 현대자동차 주관 <청소년 영화인재 발굴 프로젝트 ARTDREAM in MOVIE>라는 프로그램에 합격해 8월부터 약 8개월간 영화를 찍게 되었다. 찍는 동안 나는 정말 즐거웠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렇게 영화에 눈을 뜨게 되면서 고등학교 입시 실패라는 상처도 지워내고 있었다. 2. 빠른 호스트배정으로 1개월 먼저 출국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2015년 2월, 엄마가 나한테 교환학생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 그렇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내 어중간한 방황기를 많이 걱정하셨다. 2학년이 되면서 성적도 다시 오르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다시 활기차게 변한 나였지만 엄마는 그런 나를 걱정하셨다. 그래서 엄마가 생각하신 대안이 ‘미국교환학생’이었다. 미국에 가고 싶다고 대답을 한 순간부터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서류도 잘 마감하고, 필요한 것도 잘 챙겨서 갔다. 그 와중에도 모의고사나 학교 시험, 수행평가 등도 열심히 해서 성적도 1학년 때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미국교환학생을 준비하며 나는 최대한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들뜨고 기대가 크면 클수록 현실 상황을 마주했을 때의 실망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내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준비하면서 어려운 건 딱히 없었지만 아직도 미국을 간다는 사실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교환학생 비자를 받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국 대사관을 갔다. 떨리기 보다는 날이 더워서 빨리 받고 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고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수월하게 비자를 받았다. 비자를 받은 후 바로 호스트가 배정이 되어 7월 28일에 미국으로 향해야 한다는 메일이 왔던 것 같다. 흥분되기도 했지만 모든 게 2주 안에 준비되어야 한다는 말에 2주를 정신없이 보냈다. 3. 이제부터, 나는 내가 챙겨야 한다 7월 28일, 나는 엄마, 아빠의 배웅을 받고 태어나 처음으로 보호자 없이 홀로 비행기에 올랐다. 내 옆에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그 순간부터 정신이 확 든 것 같다. 나는 내가 챙겨야 한다, 라는 그 사실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시애틀까지 13시간 내내 날아야 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영화만 보고 마지막에 잠시 눈을 붙였다. 딱히 흥분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보니 어쩌다 밝은미래교육에서 온 다른 교환학생인 정희, 소정이, 민지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이 아이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서인지 이 아이들은 나를 따라왔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 역시 시애틀 공항의 구조를 몰라 헤매고 있었다. 결국 소정이의 핸드폰으로 미국 재단인 S4H에 연락해 장장 1시간 반 만에 프로그램 매니저 Megan과 다른 두 교환학생 수빈이와 희정이를 만날 수 있었다. S4H의 오리엔테이션은 약 1주일 간 진행되었는데 굉장히 재미있었다. 우리가 시애틀 주립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일본에서 온 아이들은 모두 짐을 풀고 로비에 있었다. 일본 친구들은 너무 친절하고 재미있었다. 나와 방을 같이 쓰게 된 나츠미도 친절하고 귀여웠다. 오리엔테이션 진행자인 Amber가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고 우리는 ice breaking time을 가졌다. 간단한 게임이었지만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시애틀에 있는 동안 아이들이랑 즐겁게 놀고 많이 배웠다. Dorm 로비에 피아노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오리엔테이션 이틀째 되는 날부터 그 피아노를 점심시간 마다 쳤었다. 일본 친구들, 미국 4-H teen helpers, 매니저들 할 것 없이 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내 연주를 들었다. 심지어 한 번은 어떤 미국 할머니께서 피아노 옆 소파에 앉아 내 연주를 들으시고 “가진 게 마땅치 않지만 좋은 음악에 보답하는 의미니 받으라”고 하시며 내게 20달러를 주셨다. 또 어떤 할아버지는 내 옆에 앉으셔서 같이 피아노를 즉석 합주를 하셨다. 내가 처음 접한 미국은 음악을 사랑하는 미국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4. 호스트집에 살 자신이 없어졌다 시애틀을 떠나 버지니아로 오는 동안 피곤했다. 그러나 잠에 들지는 않았다. 대략 6시간 정도 걸린 비행에 나는 녹초가 되었고 그건 다른 일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Charlottesville Airport에 도착해 내 호스트를 본 순간 피로는 가시고 반가움이 찾아왔다. 짐을 찾고 공항을 나와 Zzam이라는 한국 음식점에 가서 같이 비빔밥을 먹었다. 작년에 받았던 소영이(소정이의 언니)가 여기에도 왔었다며 호스트 동생인 Grace와 Leah가 말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집은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소와 닭이 있었고 작고 큰 언덕들이 있었다. 먼 길을 날아와 지쳤지만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내 방에 짐을 바로 풀고 정리했다. 한 번도 내 방을 소유한 적이 없었던 나는 방 하나를 내가 소유한다는 게 좋았다. 씻고 일기를 쓰고 잔 게 내 첫 날이었다. 둘째 날부터 솔직히 말해서 이 호스트 집에서 살 자신이 조금씩 없어졌다. 10살, 11살의 호스트 여동생들이 있었는데 내 방문을 자주 벌컥 열고 들어오길래, “내 방에 들어오고 싶으면 방문을 노크해줄래? 내가 문을 열어줄게.” 라고 여러 번 말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은 내 방에 들어와 내 물건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결국 내 전자사전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전자사전을 들어 전원을 키자 액정에 금이 간 것이 보였고 화가 났지만 “It’s okay.”라고 하며 아이들을 내 방에서 내보냈다. 그 날 저녁 나는 호스트 엄마께 말씀을 드렸고 울었다. 서럽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다음 날, 나는 노트에 내 기분과 생각을 적어서 호스트 엄마께 전해드렸고, 호스트 엄마 Becky는 그런 나를 다독이시며 만일 호스트를 바꾸게 되면 열심히 도와주실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5. U.S. History 대신 Government 수업을 들었다 학교가 개학하기까지는 열흘 정도가 남았었다. 그 동안 나는 이런 저런 집안일을 하며 가족들과 친해졌다. 포도를 따다가 벌에도 쏘여보고, 송아지 ear tag를 달다가 송아지에게 발을 밟히기도 했고 땡볕에서 일해서 sun burn을 입기도 했다. 그래도 즐겁게 살라고 노력했고 학교 개학을 기대하고 기다렸다. 8월 10일, 기대와 설렘 그리고 조금의 두려움을 안고 스쿨버스에 올랐다. 학교에 도착하자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그냥 멀뚱히 서 있었다. Hall open 시간이 8시였는데 7시 50분쯤에 도착해보니 아이들은 친구들끼리 그룹을 지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이 그저 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고 드디어 미국에서의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1학기 때 4교시, 2학기 때 4교시를 들었다. 1교시인 Intro to Drama 는 내가 가진 수업 중 가장 큰 규모의 수업이었는데, 처음엔 애들이 서로 다 친하고 수다 떨고 있어서 소외감을 느꼈다. 그래도 선생님도 좋으셨고 아이들도 좋아서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지만 수업을 재미있게 했다. 2교시인 Government는 12학년만 듣는 수업이었는데 내가 U.S. History를 들을 수 없어 대신 듣게 된 수업이었다. 이 수업을 들으며 미국 정치와 한국 정치를 비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어려워서 많이 고전하기는 했지만 많이 노력해서 최종 성적은 B를 받았다. 3교시 수업인 Jazz Band에서 한국인 교환학생인 Ben을 만났다. 그 아이는 영어도 잘 하는 편이 아니었고 놀러온 느낌의 아이였지만 나름대로 생활을 잘 해서 즐거운 1년을 보냈다. 그 수업에서 처음으로 색소폰을 불어봤다. 클라리넷을 분 적이 있어서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알토 색소폰을 불었지만 인원 변동이 있어서 테너 색소폰을 잡게 되었고, 나는 금세 색소폰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1년 내내, 나는 색소폰을 불었고 실력이 굉장히 좋아져 음악선생님이 발탁한 Saxophone Quartet의 일원이 되어 학교 행사 때 마다 연주를 했다. 4교시는 English 10 이었다. 첫 날은 하루 종일 어색하게 보냈는데 유일하게 이 수업에서 아이들이 반겨주고 잘 대해주어서 첫 친구들은 여기서 사귀었다. 영어수업은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어렵지는 않았고 재미있어서 좋았다. 6. 한국대표로 4-H Annual Conference에 참가하다 첫 스포츠로는 크로스컨트리를 시작했는데, 나는 장거리 달리기는 정말 못해서 자신은 없었지만 봄에 할 축구를 위해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크로스컨트리는 처음엔 너무나 힘들었다. 첫 날은 그냥 할 수 있을 만큼 달리라고 하셔서 멋도 모르고 달렸다가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오기를 가지고 더 달리고 하다 보니, 점점 내 기록은 단축되었다. 거기서 장거리 달리기의 묘미를 느꼈다. 아이들도 웃기고 착해서 친한 친구는 아니어도 좋은 러닝메이트가 되어 주었다. 9월에는 Arrival Meeting을 했다. 버지니아 주로 같이 온 S4H 일본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고 FLEX라는 재단의 친구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이틀 만에 우리는 코디네이터들이 놀랄 정도로 친해졌다. 주로 매뉴얼을 공부하는 거였는데, 이미 오리엔테이션 때 했던 것들을 다시 또 하는 거라 재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들었다. 아이들과는 밤새며 떠들고 놀고 하느라 월요일에 피곤한 상태로 학교를 갔지만 그래도 사진 찍고 수다 떨며 재미있는 주말을 또 이 달에 처음으로 크로스컨트리 meeting을 갔다. 잘 달리지는 못해 항상 팀에서 꼴찌였지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달렸고 내 성적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좋아졌다. 10월에는 한국대표로 4-H Annual Conference에 참여해 New Orleans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에세이를 통해 나를 한국 대표로 선정한 4-H에 감사를 드리며 3일 정도를 New Orleans에서 보냈다. 현지에서 오랜만에 일본대표로 선정된 모모치도 보고 FLEX 대표로 선정된 리자도 만나서 셋이서 즐겁게 놀았다. 대표들은 자기 나라 문화와 관련해 발표를 해야 했는데, 나는 태권도를 준비했다. 모모치는 일본의 전통 춤인 <소란 부시>를 췄고 리자는 한 편의 시를 모국어인 우크레이나 어로 낭독했다. 드디어 내 차례였고 나는 태권무를 펼쳤다. 너무나 오랜만에 하는 태권도라 예전만은 못했지만 코디네이터들과 재단 관계자들에게 큰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발표가 끝난 뒤에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즐겁게 웃으며 보냈다. 둘째 날에는 관광을 다녔다. 재즈의 고향답게 여기저기서 길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역시 재즈밴드에 있었기에 몸을 들썩이며 공연을 봤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한국 대표로써 미국에 와서 겪은 일에 대해 연설을 했다.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라 조금은 떨렸지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행히 내 이야기를 좋아해주었고 거기에 힘입어 가끔 농담도 섞어가며 연설을 마쳤다. 그 뒤로는 저녁을 먹고 댄스파티를 했다.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이 정말 즐거웠고 신이 났다.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나는 New Orleans를 떠나 Nelson에 도착했다. 7. 미국학교는 교환학생에게 관심이 많다 11월은 내게 있어 격동의 달 이었다. 나는 겨울 스포츠인 농구를 시작했다. 농구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운동 능력 덕에 빨리 따라잡아 시즌 막판에는 어느 정도 잘 하게 되었다. 내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한 홈 경기였다. 교체로 들어간 나는 열심히 뛰고 있었다. 패스를 돌리다 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 즉시 슛을 과감하게 쏘았다. 그 슛은 바로 골로 연결되었고 골이 들어간 순간 버저가 울렸다. 버저비터! 비록 졌지만 정말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IEW(International Education Week)행사로 ‘학교에서 자기 나라 문화에 대해 발표하기’ 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나는 다른 나라에서 온 교환학생들 또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Guidance 선생님과 이야기를 한 결과, 아예 한 주 동안 교환학생들이 발표하는 것으로 정했다. 첫 날은 내가, 둘째 날은 독일에서 온 Maren, 셋째 날은 스페인에서 온 Diego가 하기로 했다. 나는 정말 몇 안 올 줄 알고 학교 도서관에서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100명이 넘게 오기로 했다며 학교 강당으로 장소를 바꿨다. 내가 들어가자 학생들이 200명 넘게 온 게 보였다. 나는 미리 만들어 놓은 프리젠테이션 보드와 사진들을 보이며 한국에 대해 이야기했고 태권도를 보여줬다. 내 발표가 끝나고 어떤 친구들은 와서 너무 잘했다며 칭찬해 주었고 한국에 대해 알게 해주어 고맙다고도 했다. 정말 벅차고 뿌듯했었다. 8. 호스트맘에게 홈스테이를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11월 중순에 호스트를 바꾸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누누이 말 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스트 동생들의 태도는 나아지지를 않았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호스트 아빠는 심각하게 아프셨고 나는 이미 그 분을 한 번 도와드린 적이 있었다. 한번은 호스트 동생 중 한 살 많은 Grace가 발작을 일으키는데, 그것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중에 하나였다. 아픈 사람도 많았고 아이들과의 마찰도 잦고 결정적으로 호스트 집에 있으며 행복해질 자신이 없어져 바꿔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호스트 엄마는 마음이 많이 상하셨지만, 감사하게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새 호스트를 찾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 결과 같은 Nelson county에서 좋은 호스트를 구해 12월 중순에 호스트를 옮겼다. 새 호스트는 내 크로스컨트리 팀원의 집이었다. 아빠인 Jeff, 엄마인 Leslie, 그리고 친구이자 동생이 된 Chloe까지 세 명으로 구성된 집이었다. 호스트 엄마와 아빠는 바로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집에 빨리 적응했다. 호스트 동생은 처음에는 어색한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지만 걱정은 곧 사라지고 정말 행복해졌다. 매일매일이 즐거웠고 새로웠다. 처음으로 마구간에서 일도 해보고 아주 큰 언덕에서 썰매도 탔다. 다같이 5K Run도 달렸고 웃으며 지냈다. 9. 축구 때문에 수학에서 A를 받고 정을 붙이다 2학기가 시작했다. 1교시는 Adv.Math로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자 축구 코치님의 수업이었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수업과 선생님 덕에 항상 A를 받았고 수학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2교시는 Show choir였다. 이곳에서 친구들을 더 많이 사귀었다. 같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 보니 어느새 가까워져 있었다. 역시 음악은 만국공통어다. 3교시는 Concert band였는데, 이곳에서도 테너 색소폰을 연주했다. 이때는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콘서트에서 솔로파트를 얻어내어 연주했다. 4교시는 Graphic Imaging이었다. 여기서 Photoshop과 After Effect라는 프로그램을 배웠다. 영화를 전공하고 싶은 학생으로서 이런 저런 편집 프로그램과 보정 프로그램을 배우고 싶다는 갈망이 항상 있었는데 이 수업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수업에서 만든 artwork 들은 교실 벽에 붙어있고 After Effect로 만든 동영상 프로젝트는 4-H video contest에서 2위를 차지했다. 내 2학기의 전부는 축구에 쏠려 있었다. 나는 축구를 잘 할 뿐더러 열정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축구 하는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 우리 학교 여자 Varsity 팀은 작년도 Conference Champion이었다. 우리의 올해 목표는 챔피언 타이틀 사수였다. 잘 하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주전 선수일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첫 경기에서 주전 선수로 발탁되어 뛰었다. 정말 가슴이 뛰었다. 내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는데, 드리블 기술과 좋은 킥을 보유하고 있는 나에게 적합한 포지션이었다. 우리는 일반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학교 역사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던 시즌은 없었다고 한다. 나는 이 학교의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한 것이다. 많은 승리들 가운데에서 나는 힘들고 거칠었던 한 경기에서 쐐기골을 터트리며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축구를 하며 새로운 친구들도 만났고 원래 알던 친구들과도 더 친해지고 끈끈해졌다. 우리는 엄청난 팀워크로 Conference Champion 타이틀을 사수했고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눈물나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10. Show Choir 부문과 전체 Choir에서 1위를 차지하다 축구에서 열심히 시즌을 보내고 있는 한 편, 봄 뮤지컬 <The Little Mermaid> 준비로 모두가 바빠졌다. 나는 연기를 할 생각도 있었지만 음악 선생님이 피아노 반주자가 필요하다는 말에 피아노 반주로 빠졌다. 어려웠지만 그래도 Musical Band를 한 덕에 피아노 실력도 더 는 것 같다. 또 뮤지컬을 매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뮤지컬은 성황리에 끝이 났고, 나는 좋은 추억 하나를 더 만들었다. Show Choir과 Concert Band는 같이 콘서트를 했다. 그래서 두 수업 모두 듣는 나는 그 날 바쁘게 뛰어다녔다. Concert Band의 공연이 먼저였는데, 내 색소폰이 그날따라 음정이 미세하게 높아서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결국 내 솔로 파트에서 실수를 한 번 하긴 했지만 바로 실수를 지우고 연주를 잘 했다. 그래도 등골이 오싹했던 순간이었다. Band 공연이 끝나자마자 나는 Choir room으로 가서 의상을 갈아입고 왔다. 숨을 겨우 돌리자 공연이 시작되었다. 내가 Show choir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Jackson 5 Medley>였는데, 그게 우리의 마지막 노래였다. 나는 그 노래에서 오디션을 통해 얻은 솔로 파트가 있었는데, 실수 없이 좋은 공연을 보였다. 콘서트 내내 긴장이 되기보다는 그저 즐거웠다. 콘서트 얼마 뒤에 있던 대회에서 Show Choir 부문 1위와 전체 Choir 부분 1위를 받으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이래저래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친구들과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서 밤늦도록 먹고 마시며 놀았고, Prom에서 한바탕 춤추고 온 뒤 친구 집의 Hot tub에 들어가 지친 몸을 풀어주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친구를 우리 집에 초대해서 Camp out을 한 적도 있다.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열심히 하려고 하고 성격 또한 좋은 아이들이라서 이런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여러 번 드렸다. 같이 웃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으며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추억과 관계를 얻게 되었다. 11. 나는 신중해졌고 능동적으로 변했다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있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우선 내 교환학생 1년은 나의 ‘홀로서기’ 기간이었다. 모든 건 내가 혼자 해야 했다. 작게는 빨래부터 크게는 중요한 결정까지 모두 내가 책임을 져야 했다. 물론 여러 사람들에게서 도움도 받았다. 그러나 결정은 오로지 내가 한 것이었다. 홀로서기 하는 동안 나는 신중해졌고 능동적으로 변했다. 또 신앙심이 깊어졌다. 교회를 매주 간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 자기 전 10분 정도 기도를 드렸다. 힘든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달라고 부탁 드렸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감사기도를 올렸다. 내가 기도로 부탁드릴 때 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응답을 해 주셨다. 내가 경기를 뛸 때에도 함께 해 주셨으며 흔들릴 때 마다 응원해주셨다. 덕분에 1년을 무사히 잘 보냈다. 마지막으로 1년 간 떨어져 있던 한국의 가족과는 정이 더 깊어졌다. 단 한 번도 엄마 곁을 한 달 이상 떠난 적이 없던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을 떨어져 있으면서 엄마와 더 가까워졌고 엄마는 애교가 느셨다. 할머니는 말동무였던 내가 없으니 심심 하시다며 빨리 오라는 말을 덧붙이셨고 한국에 있는 지금은 매일 손을 붙잡고 주무신다. 아빠는 내가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있다.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다. 엄청난 모험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좌절의 순간도 있었고 기쁨의 순간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지나와서 나는 작년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1년간의 내 목표는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고 새로운 시도도 많이 했다. 그 결과 정신적이나 신체적으로도 나는 작년의 나 보다 훨씬 성숙해지고 건강해졌고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12. 그거 1년 다녀왔다고 뭐가 달라지냐? 어떤 사람은 “그거 1년 다녀왔다고 뭐가 달라지냐?” 라고하기도 한다.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그 사람이 1년간 변화를 두려워했다면. 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사람이라면 1년 동안 많이 변화했을 것이다. 내가 교환학생을 선택한 것은 정말 인생에서 제일 잘 한 선택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물어보셨던 그 순간에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나는 이렇게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교환학생으로 보낸 내 1년은 정말 값진 시간이었다.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시간이었고 좋은 기억과 사람들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이 1년은 앞으로의 내 인생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힘든 시기에 얻은 1년이라는 내 휴가 아닌 휴가는 이른바 “인생휴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신, 큰 결정을 내려주신 우리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또 1년 간 한국에서 신경 써 주시고 도와주신 밝은미래교육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엄마가 밝은미래교육을 많은 유학원 중에서 최종적으로 선택하셨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1년간 항상 옆에 계셔주셨고 지금도 옆에 계시는 주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