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수] 대안학교 학생이 미국 교환학생이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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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 학생이 미국 교환학생이 되다
Clay-Chalkville High School (AL) 미국교환 박은수 저는 충청북도 음성군에 위치한 ‘좋은열매기독학교’ 기독교 대안학교에 재학 중인 박은수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까지 이 학교에서 교육 받고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목사님이 되고 싶다’ 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는 난 사람, 된 사람, 든 사람을 학교의 교육 방침으로 하여 영성, 인성, 지성을 골고루 갖춘 세계적인 리더들을 배출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좋은열매기독학교 그러나 저희 학교는 미인가 학교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검정고시 시험을 통해 중학교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침으로 인해 저는 공교육에 있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보다 일찍 중고등 과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 그 남는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하여 저희 학교에서는 중학교 검정고시 시험 이후 어학연수를 다녀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알라바마주 Clay-Chalkville High School 저는 검정고시 준비와 함께 어학연수를 다녀 올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감선생님의 소개로 이 밝은미래교육 재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학연수를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다음 해에 대학교에 입학 할 누나가 있었기에 조금은 망설여졌습니다. 그러나 저희 부모님께서는 ‘이것은 부모님들에게 부담이 아닌 자식들을 좋은 환경에서 교육할 수 있어 오히려 기쁨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정말 감사하며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같은 학교 친구인 태우 학생과 함께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1. 출국 전, 사전적응교육을 통해 자신감을 얻다 저와 제 친구는 밝은미래교육 학생들 중 가장 얼굴이 밝은 학생이라는 말을 들으며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특히, 밝은미래교육에서 진행하는 출국전 프리미엄 사전적응교육을 받기위해, 저희가 사는 곳이 지방인지라 사실 주말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6시에 서울로 향하는 버스를 타는 것이 조금 힘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들을 통해서 친구 태우와 더 좋은 관계를 갖게 되었고 미국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서울 구경도 하며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주변 분들의 관심이나 성원이 저에겐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저희 학교에 이미 어학연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열심히 공부 중이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압박감을 오히려 제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극제로 여기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준비하였습니다. 알라바마주 Birmingham 국제공항 공항에서 호스트가족과 함께 저는 작년 5월 11일 조금은 빠른 교환학생 배정을 받아 분주하게 출국준비를 했었습니다. 그 당시 검정고시 준비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병행하며 준비했기 때문에 조금은 힘든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친구 태우가 좀처럼 교환학생 배정이 되지 않아 속상해 하는 것을 보면서 친구로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었습니다. 이런 저런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검정고시 시험 다음 날 이였던 8월 6일 저는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아침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공항에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드디어 부모님과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전날 친구들과 논다는 핑계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 너무 후회되었던 시간 이였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우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 또한 슬픈 감정을 참지 못 했었습니다. 그렇게 죄송한 마음을 한 가득 지고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2. 알아듣지 못해도 이해하는 척 하다 비행기에 탑승 후 영어를 잘 하지 못 했던 탓에 승무원이 저에게 말 걸기를 두려워했던 것과 콜라를 'Coke'이라고 말해야하는지 'Cola' 라고 말해야 하는지 몰라 물을 달라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Detroit라는 도시를 경유했습니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환승해야 했는데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 몰라 옆에 계시던 흑인 아주머니에게 무작정 여권과 비행기 표를 보이며 ‘Help me’ 라고 부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창피하기도 하지만 가만히 보면 무엇인가 문제가 생길 때 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셔서 문제를 해결 하셨던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호스트 가족과 친척들 저는 약 15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Alabama라는 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았던 주였고 지인 한 명 없는 곳에 가야 했기에 많이 긴장하였었습니다. 하지만 또 미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에 마음의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공항을 나서자 저 멀리 호스트 가족들로 보이는 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들께로 다가가는 그 짧은 시간들이 제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습니다. 짧은 시간인데도 정말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 갔습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인상과 친근한 말투로 인사해 주셔서 조금은 긴장이 풀렸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호스트 부모님들께서는 정말 많은 말들을 쏟아 내셨습니다. 저는 알아듣지 못함에도 이해하는 척을 하며 대화를 이어갔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딱 한 마디 ‘ How can I call you?'라고 여쭈어 보았었습니다. 그분들께서는 친자녀들이 부모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Mama'와 ‘Daddy'가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은 이상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지만 이러한 호칭들로 인해서 조금 더 편안하게 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도착하고 긴장이 조금 풀리자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스마텔이라는 국제 전화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수첩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정보는 사라지고 흰 종이들만 보였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스런 마음에 방에 들어가 혼자 울었습니다. 지금 당장 전화를 못 해서라기보다는 한국에서 은수가 잘 도착했을까라는 생각을 하시며 새벽 같이 일어나셨을 부모님들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월마트 앞에서 그러던 중 한국에 있는 태우와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연락이 되어 부모님과 통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애틋해져 울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었습니다. 그 다음 날 저는 Walmart에 가서 가장 저렴한 핸드폰을 구매하였고 처음 며칠 동안 매일매일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적응을 위해선 한국과의 연락을 조금은 줄여야 한다는 생각 아래 차근차근 연락을 줄여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과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생활에 열심을 가지고 생활하면 생활 할수록 그리움을 점차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3. 수학, 가장 쉬운 수업과목 도착 후 시차 적응을 위해 약 일주일 정도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지내면서 호스트 형과 함께 비디오 게임도 하고 'Walking Dead'라고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보며 미국 문화를 조금씩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한국말로 더빙되어 나오던 쇼들과 만화들이 또한 뉴스조차 영어로 나오는 것을 보며 ‘아! 내가 정말로 미국에 오긴 왔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도착한 뒤 일주일간은 삼시세끼를 호스트 가족들과 함께 먹으며 같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ICES지역 관리자 분께 한 통에 문자가 왔습니다. 그 문자의 내용은 제가 너무 닦지 않아 냄새가 좋지 못해 호스트 가족들이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순간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아! 나에게서 김치 냄새가 나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치 냄새를 하루 빨리 없애기 위해서 저는 김치를 사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개월 동안 김치를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라면 또한 냄새가 나게 만든 요인일 것 같다는 생각에 라면 먹기도 그만했었습니다. 가끔씩은 이 라면과 김치가 얼마나 생각이 나는지 사진으로 슬쩍 보기만 해도 목구멍으로부터 김치와 라면 냄새가 올라오며 침이 고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호스트 가족들로부터 생활 습관이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것은 생활습관의 문제가 아닌 어쩔 수 없는 문화차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미국에 왔으니 미국 사람들의 문화, 식습관을 따르기로 하자고 결심하였습니다. 풋볼경기장 앞에서 시차 적응을 마친 뒤에는 본격적으로 학교수업을 시작하기 위해 학교에 갔습니다. 한국과는 다르게 직접 과목을 선택하여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역사, 영어, 스페인어, 컴퓨터, 수학수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중 가장 흥미 있었던 과목은 미국의 역사를 배우는 과목이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세계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 배우긴 했지만 훨씬 세부적으로 배우니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학 수업은 가장 쉬웠던 수업이었습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비해 수학을 좀 더 낮은 수준의 수학을 배우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어 수업과 같은 경우 처음 시작할 때 주변에서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스스로 하기도 했었지만 언제 또 스페인어를 배워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배우기로 결정했습니다. 4. 30초의 사나이 학교 축구팀 수업은 상담사와 상의하여 잘 선택 할 수 있었지만 그곳에 친구들과 친해지는 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 보자마자 다가와서 말 걸어주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본체만체 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체만체 하는 친구들도 한국에서 가져온 사탕이나 필기구를 나누어 주면 관심 갖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한국인 교환학생이 가져온 사탕이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친하지 않던 또는 모르는 아이들까지도 제게 와서 사탕을 나누어 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학기 중에는 아무런 방과 후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사탕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학기가 시작 되었을 때는 National Honor Society라고 하는 우등생 단체와 축구부에 가입하여 사탕 없이도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습니다. 축구부에는 5~6명에 멕시칸 친구들이 있었는데 지난 학기 때 배운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 금방 친해 질 수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는 좋아하는 축구 선수 이름 또는 팀 이름 등 관심사가 같은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금방 친해 질 수 있었습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학생회 예배를 참석하고 드라마 팀에도 가입하여 예배시간에 찬양하고 악기 치는 것을 통해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습니다. 축구 경기 도중에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방법은 바로 축구였습니다. 축구를 통해 살을 맞대고 이기기 위해 많은 대화를 하며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아이들 무시하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축구 감독마저 저를 무시하여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진행하는 인 스쿨 게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인 스쿨 게임이란 누구든지 수업에 상관없이 티켓을 사게 되면 수업시간 도중 나와 경기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대략 500명 정도가 되는 학생들이 나와 경기를 관람했었습니다. 저는 오늘도 벤치를 지키겠지 하며 우리 팀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 되었을 때 감독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교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뭐 오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갔고 30초 만에 골을 넣으며 감독의 신뢰와 선수들 간의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이들은 저를 은수라고 부르는 대신에 ‘30초의 사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다음 경기부터 당연한 듯이 선발을 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학교에 복도를 지나다니다가도 아이들이 제게 와서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학교 대표로 축구를 하고 싶었지만 심장질환으로 인하여 그 작은 꿈을 접었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는 학교 대표로 뛰며 어렸을 때부터 꿈 꾸어왔던 학교 대표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지역 주 대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2대 0으로 이기며 당연한 듯이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반 시작 후 4골을 연달아 먹히며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저희는 정말 죽을 각오로 경기에 임했고 기적처럼 4대 4로 동점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연장전까지 가서 결국에는 승리했습니다. 경기 후 저는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 앉아 호스트 엄마께 오늘 월드컵에 나간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축구에 대한 관심보다 미식축구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기 때문에 잘 이해를 하시지 못하셨지만 제가 굉장히 기분이 좋다는 사실은 이해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서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과도 좋은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5. 자기 삶을 만족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다 좋은 추억들도 많이 만들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끔은 호스트 가족들과의 문제들로 속이 상하기도 했었습니다. 한 번은 지갑에 돈이 사라졌던 적이 있습니다. 적지 않은 돈을 잃어버리자 어린 마음에 울컥하기도 하고 화도 났었습니다. 그런 도중 저는 호스트 형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호스트 형은 저에게 제가 잃어버린 만큼의 돈을 주며 자기는 요즘 일도 많이 하고 생일이라 용돈도 많이 받으니 괜찮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이 돈을 대신하여 줄 테니 호스트 부모님께는 말씀 드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형의 모습을 보며 고마운 마음이 생기기보다 오히려 이 형이 내 돈을 가져가지 않았을까라며 형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이 문제로 인해 한 동안 이 형을 많이 미워하곤 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지나친 탓에 저 스스로도 괴로웠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더 하나님께 이해할 수 있는 마음과 용서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다시 형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있으면서 더욱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면 기도나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매달렸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한 번은 미국 생활로 인하여 몹시 지쳐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호스트 가족들과의 문제도 아니었고 학습 관련된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냥 가족들을 떠나 있다는 생각 아래에 많이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정말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한 참 그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한 미국인 누나가 제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너를 잘 모르고 네가 어떠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꾸 너를 위해 기도하게 만드셔. 하나님께서 너를 세계적인 지도자로 만들어 가실 거야.” 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통해서 정말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미국에 제가 오게 된 진정한 이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꿈인 학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유학을 결정할 때 들었던 생각이 ‘만약 내가 목사님이 된다면, 굳이 영어를 잘 해야 할까? 그냥 수능에 맞추어 성적만 맞추면 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미국인 누나가 해주는 말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저를 반드시 세계적인 지도자로, 목사님으로 사용하실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랬기에 힘든 시간들을 잘 버티어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힘든 시간 늘 위로해주시고 새 힘, 새 능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또한 힘든 시간들을 잘 버텨낼 수 있던 방법으로는 교환학생들 간의 모임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Georgia라는 주에 1박 2일로 놀러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세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달리며 저희는 호스트 가족에 관한 이야기와 학교에 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 보는 친구들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 더욱 친숙함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그 아이들의 말을 듣다 보면 ‘진짜 별 호스트 가족들이 다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저 아이들보다 좋은 가족들을 만나서 생활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생활하다보면 매일 매일이 행복할 수는 없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자기 생활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6. SNS를 오래하면 미국인과 소통하기 어려워진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영어 실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좀처럼 영어가 늘지 않는다고 느낄 때에는 너무 하기 싫어 그냥 포기하고 싶은 생각들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열심히 한국에서 돈 벌고 계신 부모님과 그 분들의 기대를 생각하면 공부를 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아무런 공부할 것들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 갔을 때에는 동화책을 읽으며 책에 나오는 모르는 단어들을 찾아보며 공부했었습니다. 또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는 역사책 또는 경제에 관한 책을 읽으며 모르는 단어들을 모아 단어장으로 만들어 공부하곤 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단어 뜻을 알고 있어도 문맥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열 번씩 읽어가며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 페이지를 읽는데도 한 시간 정도를 소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매일 조금씩 양을 늘려나가다 보니 읽는 속도도 굉장히 빨라졌고 이해도 전보다 잘 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또한 한국과의 지나친 연락과 대중 매체의 영향이 영어 공부에 방해 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SNS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정말로 SNS를 오래 하다보면 호스트 가족들과 대화하거나 친구들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기분 탓일 수 도 있지만 이런 생각들과 분위기가 공부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부 할 때에 마음가짐과 평상시 생활 할 때에 마음가짐 모두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책으로도 영어를 배울 수 있었지만 호스트 가족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많은 영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호스트 가족들은 신실한 기독교인 이였기 때문에 함께 공통된 관심사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는 영어를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신감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렇게 대화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제가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호스트 가족 분들께서는 제가 원래 성격이 조용조용한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는 한 번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루 밤을 호스트 할아버지 댁에서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물어보시는 말에만 대답했었기 때문에 호스트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영어를 할 줄 아는지 여부에 대하여 호스트 아빠에게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한 4개월에서 5개월인 시간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에 저로서는 제가 지난 4개월, 5개월을 낭비한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의도적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고 누구든지 만나면 대화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드라마나 영화들을 보면서도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도착했을 때 형이 보여준 Walking Dead라는 드라마는 이미 시즌 6회에 접어들어 있었고 두 달 뒤면 새로운 시즌이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두 달 뒤 시작하는 드라마를 같이 보기 위해서 저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Walking Dead를 5~6시간씩 보기 시작했습니다. 호스트 친척과 함께 제가 계산해 본 결과 저와 호스트 형은 2달 동안 72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드라마를 함께 보면서 호스트 형과 친해 질 수 있었고 같은 관심사가 생겨 이야기 할 거리 또한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 사람들이 보는 드라마들을 통해서 미국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법 또는 생활 방식을 비추어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무언가 책상에 앉아 공부할 때도 실력이 느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대화 또는 드라마, 영화들을 보는 등 문화를 접하여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었습니다. 영어 실력이 늘어 가면 늘어 갈수록 저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7. 이렇게 공부해서 어디에 쓸까?! 친구와 함께 이렇게 공부해서 과연 어디에다 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만약 진짜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이 일 년이라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면 굉장히 후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토익 또는 토플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어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단기간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기회를 잘살려 정말 특별하게 하나님께 사용 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꿈인 학생으로서 처음에는 내가 만약 목사님이 된다면 굳이 이렇게 까지 영어를 공부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환학생 프로그램 이후 저는 하나님께서 이 기회들을 통해 저를 훈련시키셨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일을 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직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도함으로 노력함으로 하루하루 준비 되어져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신앙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지적인 부분, 인성에 관한 부분 모두 잘 관리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끝으로 성공적인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위해 수고해주셨던 밝은미래교육 재단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