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진로란 ‘부모의 사랑’에서 시작된다.

미국무부 교환학생 참가후기
[김도영] 이 기회를 꼭 붙잡으라!
이 기회를 꼭 붙잡으라!

Roosevelt High School (TX) 미국교환
김도영

침대에 누워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따르르릉. 엄마의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아니 거의 우는 듯이 하였다. "도영아 큰일 났어! 너 내일 모래 출국이야!"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겠다고 한 것은 나였지만 갑작스런 통보에 모든 게 멈추었다. 이것이 나의 시작 이였다. 다행히도 짐을 차근차근 쌓아두고 있던 나는 어렵지 않게 짐을 쌀 수 있었다. 모든 지인들에게 인사를 할 수는 없었다. 친구들이 나를 나무라기도 하였다. 그래도 1년 후 다시 볼 것을 약속하며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내가 배정된 곳은 텍사스에 있는 샌안토니오였다. 미국에 도착 한 후 정말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한 날 들 이었다. 학교도 좋은 친구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카운셀러와 함께 정한 수업들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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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부모님과 동생들

난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국 가기 전 나의 고1 평균 등급은 6등급 이었다. 영어도 어릴 적부터 영어 노래나 구연동화 CD를 듣고 자란 덕분에 듣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었다. 하지만 말 한마디 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간단한 질문이라도 머릿속에서 이렇게 말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문법은 맞는지, 혹은 내가 말을 잘못해서 그들이 웃으면 어쩌지?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 yes 아니면 no오 대답만 2주 이상 하였다. 그러다 문득 '네, 아니요 로만 대답할거면 미국에는 왜 온 거지? 이러면 늘 수가 없고 제자리걸음만 할 거야'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일단 말해보기로 했다.

묵언 수행 2주의 도움인지는 몰라도 조금 생활 해보니 그들이 자주 쓰는 문장이나 단어들이 내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표현하고 대화하는 사이 나는 이제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교환학생인줄 몰랐던 친구들은 내가 교환학생이라는 말을 듣고 "정말? 난 네가 여기서 태어나 자란 줄 알았어!" 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나는 이제껏 문법 위주로 이 문장은 몇 형식이고, 어떤 문법이 적용되어있는지 배우다 보니 신경 쓰느라 말도 못했는데 미국에서 1년 살아보니 그런 것이 꼭 중요하다고는 못 느꼈다. 물론 중요한 에세이나 글을 적을 때는 중요하지만 친구와의 대화에서는 내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여 들어주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는 최대한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과제도 그때그때 제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점수를 받을 때에는 선생님께 찾아가 무엇이 문제인지 여쭤보고 저수를 수정하였다. 그 덕에 미국에서 머문 두 학기 모두 올 A를 받을 수 있었다.

공부는 정말 친해질 수 없는 것같이 지냈지만 미술은 어릴 적부터 늘 나와 함께했다. 수업시간, 방과후, 자기 직전 등 늘 나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전공으로서 미래에 나의 직업으로서 미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입시학원을 다니며 디자인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미국에서도 하루에 2시간씩 미술 수업을 들었다. 한국에서는 시간을 주고 그 시간 안에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게 일상 이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시간도, 주제도 심지어 어떤 재료를 쓸지도 내가 정해서 할 수 있었다. 늘 디자인을 하면서 분명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인데도 스트레스를 받고, 심하면 울기도 하였다. 그런데 미국에 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다 보니 선생님의 눈에 들어 전시회도 2번이나 참여했고, 각종 대회에 나가 1등을 받았다. 그리고 여러 대학에 나의 그림을 보여줌으로서 대학교에 관련하여서도 생각 해 볼 수 있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그리며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평소에 관심분야 중 하나였던 심리치료가 더 마음에 와 닿았고, 미술과 심리치료를 함께 할 수 있는 미술 심리치료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유치부 교사로서, 찬양 팀의 반주자, 싱어, 그리고 율동 팀으로서 늘 섬겨왔고 주일성수도 빠지지 않고 하였었다. 가기 전 엄마와 나의기도 제목은 교회를 다니는, 예수님을 믿는 집안을 만나는 것 이였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들어주셨다. 무려 10,000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큰 교회였고, 예배 시간도 토요일 1번 주일 4번에 스페인어 예배와 아이들 예배도 따로 있을 정도로 정말 큰 교회였다. 첫날은 교회 크기에 놀랐고 그 다음 주는 예배의 형식에 크게 놀랐다. 한국의 교회들은 정장에 근엄함을 강조하시는데 우리 교회는 바지의 캐주얼에 친근하시고 예배보다는 기독교적 강연을 듣는 기분 이였다. 게다가 교회에서 쓰는 단어들은 잘 쓰는 단어들도 아니라서 너무 어려웠다. 미국은 통성기도가 없다. 그래서인지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이게 맞는 건지 생각도 들고 점점 기도를 안 하는, 나태해지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 가족은 교회 나가기를 정말 좋아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예외가 가끔 있었다. 파티나 여행이 있으면 교회에 못나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날 붙잡으셨고 개인적으로라도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게 하셨다. 더 감사 한것은 9월 즉 미국의 새 학기에 이렇게 큰 교회에서 찬양 팀의 반주자로 섬길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주님이 주신 나의 재능으로 아이들 예배부터, 본 예배 그리고 크리스마스 예배까지 섬길 수 있었다.

난 정말 미국에서 내 인생에 경험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 왔다.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생활까지 미국에서 하고 오고 싶었지만 부모님과의 상의 끝에 한국에 돌아왔다. 누군가 1년 뒤처진다는 것이 부담이 크고 힘들고 무섭지 않느냐고, 왜 그 시간을 버렸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난 그때마다 늘 하는 말이 있다. "내가 1년간 한국에서 주입식 교육으로 성적을 올리고 미술만 했다고 더 큰 생각을 가지고,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루기 위해 발버둥 쳤을까? 난 시간을 버리거나 허비하면서 논게 아니야. 성적과 나의 실력보다 나 자신의 마음가짐과 생각의 크기, 그리고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더 많은 것을 배웠고 날 돌아보는 시간이었어." 라고. 지금은 원래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한 학년을 낮춘 2학년으로서 재학 중이다. 복학생이라고 어색하거나 안 좋은 시선은 전혀 없다. 오히려 아이들이 더 의지하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복학의 문제에서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있고 함께 다녀온 다른 교환학생들도 모두 한 학년 낮췄음에도 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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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집에서 놀던 중에

혹시 지금 고민하고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고등학생 때 다녀오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대학생 때 가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중, 고등학생의 뇌와 대학생의 뇌는 몇년 차이도 안 나는데 습득력이 확연히 다르다고 한다. 어릴수록 더 잘 받아드리고 더 잘 응용한다. 그리고 배울 수 있는 것도 너무나 다르다. 대학에서의 교환학생은 정말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학생인 우리는 공부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저 놀며 끝난 것이 아니라 다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나는 미국이나 외국의 대학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미래의 직업도 바뀌고 깊이 있어졌다. 가기 전에는 무조건 한국에서라는 생각이 컸었다. 이만큼 내겐 큰 변화의 계기가 된 1년이다. 만약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나 당신의 자녀가 고민 중 이라면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 경험할 이 기회를 꼭 붙잡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