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에서도 나아가는 진정한 용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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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교환학생] 두려움 속에서도 나아가는 진정한 용기 (1)
2015년 미국교환학생 김민진
처음 들었던 유학이라는 말은 나에겐 마냥 설레기만 한 단어였다.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본 것이지만 나에겐 다른 사람의 이야기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교환학생으로 유학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다가온 순간부터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교환학생을 준비하는 초반에는 나에게 꿈인 미국에 간다는 것이 너무 좋았고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호스트가 배정되고 출국이 가까워질수록 나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는 곳은 오하이오 주 케터링(Kettering)이라는 곳이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곳이고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교환학생들의 블로그를 찾아보며 기대반 두려움반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미국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싸고 새벽부터 인천공항에 도착해 출국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을 몇 번 가보긴 하였지만 모두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었고 이번에는 온전히 나 혼자였다. 그렇지만 내 자신을 믿고 공항에서 멀어지는 가족들을 보며 눈물을 참고 유학길에 올랐다. 12시간을 날아서 도착한 시카고 공항은 만만치 않았다. 비행기에 내려서 공항검색대에 가야 하는데 시민권자 전용인 곳으로 간 것이다. 다행히 다시 나와서 잘 통과하긴 했지만 넓은 공항은 나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단계를 마치고 비행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너무 배가 고팠고 목이 탔지만 외국인과 대화 하는 것이 무서워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2시간을 기다렸다. 1시간 정도 소형비행기로 날아 도착한 데이튼 공항은 작지만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짐들이 잘 왔는지 걱정이 됐다. 호스트맘과 코디네이터가 나를 데리러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반쯤 혼이 빠진 상태로 대충 인사하고 짐을 찾는데 급급하였다. 나중에 호스트맘이 말해준 사실이지만 그때의 나를 봤을 때 황당했다고 한다. 호스트맘의 집에 도착한 뒤 모든 긴장이 풀리고 짐을 대충 정리한 다음에 2일 동안은 잠으로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의 학기는 곧 시작했지만 준비할 것들이 많아 학기가 시작한 뒤 1주일 뒤에야 등교를 할 수 있었다. 부푼 기대와 떨림을 안고 한 첫 등교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스쿨버스를 타고, 나의 시간표를 대학생처럼 내가 직접 짜고 교실을 바꿔가며 여러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던 것이 너무 좋았다. 나는 한국에서 고등학생 때 쉽게 배워볼 수 없는 요리, 사진 수업을 선택했다. 내가 처음 사귄 친구는 재닛(Jeannette)이라는 아프리카 아이였다. 그 친구는 1교시인 영어시간에 영어선생님의 배려로 나의 뒷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많이 도와주고 무엇보다 같은 ESL 시간이어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수업이 많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으나 영어로 된 책을 읽고 국어시간에 하던걸 영어로 하니깐 어려운 점도 많이 있었다. 2교시는 역사시간이었는데 역사는 내가 가장 힘들어하던 과목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도 역사를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오기 전에도 가장 많은 걱정을 하고 있던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카운슬러와도 많이 이야기하고 담당 선생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해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5교시인 ESL시간은 영어를 제2외국어로 하는 학생들을 위한 수업이었는데 각국의 친구들이 있었다. 알제리, 스페인, 멕시코, 아프리카, 리비아 등 학교 안은 작은 ‘세계’ 같았다. 모두들 교환학생이었던 나를 잘 이해해주었고 영어가 조금 서툴러도 많이 이야기 하려고 노력하였다. 무엇보다 이 시간은 수업시간이라기 보다는 자습시간 비슷한 거여서 수업하다 이해 못한 부분이나 어려웠던 부분을 다시 한번 복습하거나 친구들이나 선생님께 물어볼 수 있어서 수월한 시간이었다. 6교시 였던 사진 수업시간이 나에게는 작은 충격을 주었다. 처음 수업을 신청할 때 당연히 SLR사진기로 사진을 찍고 학교주변에서 하는 식의 수업일 줄 알았는데,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암실 안에 들어가 CSI에 나오는 것처럼 인화도 하는 상상하지도 못한 수업이어서 그 시간이 너무 재미있고 모든 7개의 수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었다. 미국에서의 친구 사귀기는 그렇게 쉬운 편은 아니었다. 미국에 살던 경험이 있고 자주 여행을 해봤고 또 전화영어를 했을 때 그리 문제가 많았던 게 아니어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줄 알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고 자만이었다.한국에서 외국인은 기껏 해봐야 한번에 한 명씩 이야기를 해서 그렇게 무섭거나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한번에 많은 미국인들과 이야기 하려니 말이 목에서 막히고 목소리도 주눅 들고 작게 나와서 친구들이 두 번 물어보는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고 오던 아이들도 내게 흥미를 잃는 것 같았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내가 그 아이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먼저 말을 걸려고 노력하고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들이나 간식 같은 것도 주면서 점점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친해지고 같이 이야기할 주제가 생기고 나니 한국에 대해 많이 물어보고 가끔 한국어를 시켜보기도 하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국생활이 힘들지는 않은지 가족들이 그립지는 않은지 많이 걱정해줘서 미국에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 같이 편하고 진짜 가족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특히 교회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호스트맘이 다니던 교회는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grace community라는 교회였다. 미국에 막 왔을 때 친구가 거의 없어 걱정을 하던 때 호스트맘이 교회 청년부에 가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약 20명 정도의 중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하게 있어 같이 게임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며 점차 어색한 분위기를 줄이고 다양한 이야기도 하며 무엇보다 한국에 대하여 많이 물어보아서 한국 문화를 전파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가끔 청년부 여학생들끼리 집을 하나 정해서 sleepover*를 하기도 하였다. 주로 토요일 일요일에 하였는데 일요일 아침에 다같이 일어나서 교회를 같이 갔다. 그리고 같이 쇼핑도 갔다. 이제는 정말 편하고 든든한 친구들이다. 특히 리사라는 친구가 나를 많이 도와줬다. 리사는 학교에 한국인 친구가 있어서 나와 처음 말할 때 어색함이 별로 없었다. 한국문화에 대해서 아는 것도 좀 있었고 다른 친구들보다 친해지기는 더욱 쉬웠다. 리사 덕분에 교회 친구들과도 많이 친해 질 수 있었고 이제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처럼 편한 사이가 되었다. 친구들이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 중 하나가 한국의 고등학교 이야기였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미국에 온 나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한국 친구들에게도 물어보면서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진심은 통하는 건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친구들도 생겼고 많이 가르쳐 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서로 생김새가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진심을 가지고 친구들을 대하면 언젠간 진심은 통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sleepover: 아이들이나 한 집에 모여 함께 자며 놀기, 밤샘 파티. 미국에 오고 한 달쯤 되자 유학 우울증 같은 것이 왔다. 중3 끝나고 겨울방학에 온 것이어서 졸업식을 못했는데 그 시기에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고 집에 가고 싶은 충동이 가장 큰 시기였다. 수업도 힘들었고 친구가 많을 때도 아니었고 철저하게 사막에 혼자 동떨어져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미국에 온 것이 잘한 일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나, 내게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인가 많은 고민을 했다. 앞으로 1년이라는 시간을 내가 잘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멈추고 포기해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엇이든 해보려고 하였다. 일기를 쓰면서 나의 기분을 말하고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친구들과 쇼핑을 가기도 하고 몸으로 무엇이든 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차츰 나아졌고 일주일 정도 지나니 정말 괜찮아졌다. 미국에 계속 있으면서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그 한번의 시련을 넘고 나면 더 큰 것들이 찾아온다. 한국에서는 못해본 홀로서기를 진짜 체험한 것이었다. 부모님 곁에서 어리광만 피울 줄 알던 내가 비록 짧은 1주일의 시간이었지만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이기는 법을 배웠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 있었다. 안정적이고 편한 환경에서의 나였다면 미리 포기하고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했겠지만 철저히 혼자였던 나는 맞서는 방법 밖에 없었다. 교환학생 생활이나 유학생활은 고통을 즐기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