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미국 교환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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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을 배우다
Albert Gallatin High School (PA) 미국교환 연세대학교 김희래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고 있을 때였다. 엄마가 갑자기 나에게 꺼낸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희래야, 너 미국 한번 가보지 않을래?” 유학이라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멀고 생소한 단어가 귀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졌던 것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나는 아직 중학교 3학년이었고, 먼 나라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엄마 아빠가 있는 집에서 하루하루 밥을 먹고 학교를 다니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선가 엄마가 들어온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나는 그렇게 만났다. 밑에 동생 두 명이 있는 장녀로서, 사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던 나였다. 초등학생 시절 여름방학 캠프에서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지내는 것도 체험해보고, 또 맏딸이라는 막연한 책임감 때문인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부모님께 의존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교환학생이라는 것도 크고 무서운 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여름방학 캠프 정도의 크기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영어에 자신 있었던 나였다. 중학생 때 친 TEPS는 700점 중후반대를 넘나들었고, 이 정도면 중학생 치고 양호한 영어 실력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다. 미국 교환학생을 어렵지 않게 가기로 결정한 이유 중에 하나도 이 때문이리라.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내 의견을 피력하고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날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도 이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영어 공부를 해온, 소위 ‘토종’ 학생으로서의 영어 실력은 우수한 편이었지만, 확실히 유학 경험이 있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선 월등히 뛰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단기간이지만 미국에 다녀옴으로써, 나는 내 장점인 영어 실력을 극대화 하고 싶었으며, 나의 발전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끼리 여행을 많이 가곤 했는데, 나는 항상 여행의 순간 순간이 행복했다. 새로운 나라의 거리와 그 공기를 느끼며, 이국적인 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항상 신선했다. 미국이라는 내가 가보지 못한 거대한 세계에 엄청난 호기심을 가졌던 것 같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야를 확대하고 싶었다. 되돌아보면,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었던 중3짜리 치고는 꽤 대담한 결정이었다.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나에게 다가오는 첫 번째 큰 터닝포인트이자 기회였고, 조용했던 그 여중생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과정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 호스트 패밀리 배정을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주의 끝자락인 Point Marion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백인 가정이었다. 이들이 제일 먼저 나를 ‘선택’해 주었다는 사실에 많이 기뻤던 기억이 난다. 시간을 맞추어 Skype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고, 출국 하기 전까지 바쁘게 서로 메일을 주고 받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 침구는 어떤 패턴이 좋은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매우 소소하고 개인적인 질문을 받으면서 나는 호스트 패밀리와 점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나는 정말 담담하고 차분했다. 솔직히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직까지 놀랍다. 혼자 타보는 첫 비행기였고, 처음 가보는 미국이었다. 놀랄 만큼 담담하고 차분하게, 나는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미국 땅을 밟고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 호스트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원체 마음이 여렸던 호스트 엄마 Robin은 날 보자마자 감동에 젖어 눈에 눈물이 고였던 것 같다. 나보다 한 살이 더 많던 호스트 언니 Becca는 반갑다고 말하며 나를 꽉 안아줬다. Bill의 이름의 호스트 아빠는 아직까지 내가 어색했는지, 악수를 청하고 우리는 근처 멕시칸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집으로 갔다. Point Marion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끝자락에 위치한 시골 동네였다. 아빠 Bill은 트럭으로 빵을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엄마Robin은 자택근무로 종합 병원의 안내 전화를 맡는 일을 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진 않지만,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정말 감사했던 점은 나를 진짜 가족의 일부로 받아주어 경제적으로 내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서 외식을 하고 난 후 자신은 호스트 패밀리와는 따로 돈을 낸다는 말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를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여 무엇을 하던 함께 나누어 주던 우리 호스트 가족의 아량에,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를 반기던 친구는 Maggie라는 슈나우저였다. 어릴 때 다른 사람들이나 강아지들을 많이 만나지 못해 사교성이 매우 낮고 낯선 사람들에게 공격적인 이 강아지는 아니나 다를까 나를 향해 몇 분간 짖어댔다. 하지만 Maggie 이상하리만큼 빨리 나에게 경계를 풀었고, 그 날 밤 내 발치에서 잠을 잤다. 호스트 가족의 애완 동물은 강아지뿐만이 아니었다. 우선 늙은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고, 여기에 앵무새 세 마리가 같이 살고 있었다. Izzy와 Gabby라는 이상한 이름의 회색 앵무새들은 매우 컸으며, 놀랍게도 말을 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던, 새들은 나와 전혀 친하지 않았다.내가 그들이 받던 관심과 사랑을 가져갔다고 느꼈는지는 몰라도, 항상 나를 보면 깃털을 세우고 나를 공격하려고 했다. 나와 사이가 좋든 안 좋든, 이 친구들은 내가 처음으로 사귄 동물 친구들이었다. 개와 고양이, 그리고 앵무새와 함께 생활하는 것은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일상의 공허함을 차고 넘칠 만큼 채워주었고, 그들의 존재감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솜이라는 강아지를 입양하기에 이르렀다. 생활 방식이 달랐던 호스트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항상 쉬웠던 것은 아니다. 호스트 언니 Becca는 이제껏 청소와 빨래, 그리고 설거지를 담당했는데, 나는 Becca와 함께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한국에서 해보지 않은 집안일을 맡아 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나와 호스트 언니가 동아리 때문에 바빠 미처 설거지를 못해 설거지가 쌓여 있어도 호스트 엄마와 아빠는 손도 대지 않을 때,많은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철저하게 자신이 맡은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다. 힘들었지만 나는 이런 순간들을 통해 책임감과 독립심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맡은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배우면서 나는 조금씩 성장해나갔다. 언제나 엄마가 해주던 일들이 얼마나 버겁고 고된 일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엄마의 위치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해 줬던 시간이기도 했다. 집에서 30분 정도 스쿨버스를 타면 도착하는 학교는 Albert Gallatin Senior High School이었다. 백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학교에서 동양인은 나 하나였다. 난생 처음 보는 동양인 학생에, 학교 학생들은 신기하기도 했고 또 그만큼 거부감을 가진 듯 했다. 그래서인지 학기가 시작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친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내 호스트 언니 Becca의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학교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조금 덜했다. 내가 스스로 내 친구를 만들 수 있던 동기는 바로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 아직 한국에서는 중학생인 내가 미국에서는 9학년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가 12학년까지의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나는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진한 화장을 하고 동양인보다 더 성숙해 보이는 친구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참 힘들 때가 많았다.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친구 Lindsey 덕분에 내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업이 끝나고 다음 강의실로 이동하는 복도에서였다. 활기차고 성격이 좋아 다른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Lindsey는 장난기가 많은 친구였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시답잖은 농담을 내게 했는데, 무슨 용기에서인지 나는 그 농담을 제대로 받아 치며 웃었다. 그 이후로 나는 급속도로 Lindsey와 친해지게 되었고, 덩달아 Lindsey의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그 동안 힘들어하던 시간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 같았다. 진작에 내가 용기를 내어 이들과 친해졌더라면, 이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을 테다. Lindsey는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그 친구 집에서Lindsey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웃긴 farewell 동영상도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쉬움이 많았던 친구 관계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내성적이고 차분하기보단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친해지고 싶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이 사교성은 지금까지 내가 사람들을 대할 때 좋은 영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생활 동안 친구 관계에서 아쉬움이 남는 만큼 지금은 후회 없이 친구들을 사귀고 있다. 미국에서의 공부는 참 쉬웠던 걸로 기억한다. 수학 수업은 계산기를 쓰는 것보다 손으로 푸는 것이 훨씬 빨랐고, 이런 나를 친구들과 심지어 선생님까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제일 기억에 남는 수업은 Biology였다. 매 수업마다 용어 정리를 해가야 했고, 매주 퀴즈를 봐야 했던 꽤 밀도 있는 수업이었다. 개인 발표에서 나는 브라우니를 구워 그 위에 세포 조직을 아이싱으로 표현해냈는데, 친구들에게 정말 인기가 좋았던 기억이 난다. 발표를 끝낸 후 다같이 브라우니를 나눠 먹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에 대해 많이 알리고 싶었다. 학기 초,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묻던 흑인 여자 아이에게 “I’m from Korea”라고 하자, 한국이 미국의 어느 주인지 물어본 그녀의 질문이 꽤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North Korea인지 South Korea인지 물어보는 것은 양호한 질문이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후부터, 나는 이들에게 한국에 대해 최대한 많이 이야기하고 알려주고 싶었다. Public Speech라는 수업에서, 김연아와 반기문에 대해 개인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이 존경하는 위인에 대해 에세이를 쓰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여기서 반기문의 유년기에 대해 이야기했고, 또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자유 주제 발표에서 나는 김연아의 끈기와 노력에 대해 친구들을 대상으로 발표했다. 모두 다 신선한 내용이었기에 호평을 받았고, 학기 말 Public Speech에서 A를 받아 매우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호스트 언니 Becca를 따라 들었던 Choir 수업에서도 한국에 대해 알리고픈 나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학기말 Choir concert에서 지도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나는 아리랑을 한국어로 독창했다. 학교 대강당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조용히 아리랑을 부르던 동양인을 사람들은 신기하게 봤으리라. 미국에서 지내면서 나의 삶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던 활동은 호스트 언니를 따라 들어간 Drama Club이다. 여기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오디션을 보고, 뮤지컬의 아주 작은 배역을 맡게 되었다. Dr.Seuss의 여러 책들을 이어 붙인 뮤지컬 Seussical을 준비하던 시간은 내 생에 가장 빛나던 순간들 중에 하나이다. Ensemble이지만 주연 배우들 못지않게 많은 준비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 함께 하나가 되어 엄청난 결과물을 만드는 그 희열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특히 5,60명이 되는 거대한 규모의 공연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공연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Drama club 멤버들은 페퍼로니 롤 (아주 맛있다!)을 학교 및 이웃들에게 팔았고, 여기서 모인 기금을 통해 공연 자금 을 마련했다. 공연 몇 주 전에는 모두 다 Hell Week라고 하는 집중 연습 기간에 들어갔다. 수업이 마치는 2시부터 밤 10시까지 공연 연습을 하고 피드백을 받는 기간이었는데, 안무가를 초청해 강도 높은 안무 연습을 받는 등 모두의 신경이 공연에 쏠려 있는 시간이었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연습할 때가 많았지만, 난생 처음으로 무언가에 흠뻑 빠져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묘사하기란 끝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경험을 하나로 요약하자면, 미국에 있던 시간은 내가 정신적으로 가장 많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짧다면 짧은 스물 하나의 생애에서 가장 죄책감 없이 행복할 수 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내성적이고 차분한 누에고치에서 나와 화려하게 꽃을 피워낼 수 있던, 내 일생 일대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미국에서의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온 나는 휴학계를 냈던 중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 언니로서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 입시를 치렀고, 그 결과 울산외국어고등학교 영어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외고 생활은 생각처럼 순탄하지는 않았다. 학교에 대한 기대는 현실과의 괴리로 너무나 일찍 깨지게 되었고, 보수적이고 규율을 중시하는 학교 및 기숙사의 분위기는 나와는 맞지 않았다. 어릴 때의 치기인지, 나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발악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공기와 나는 참 많이도 싸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학교에선 참 열심이던 나였다. 1학년 2학기 때 성적이 올라 전교 내신 상위권에 도달했고, 덩달아 모의고사 점수도 웬만큼 나와주었다. 교내 활동에 참 열심히 임하기도 했다. 2학년 때 반장 활동과 더불어 교내 합창부 부장도 함께 역임했고, 교내 또래 교사 프로그램에 참여해 또래 교사로서 친구들의 수학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2학년 때가 내 고등학교 시절 중에서 가장 힘들고 바쁜 시간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일을 어떻게 다 해냈는지 모르겠다. 3학년에 들어서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웠던 이유가 2학년 때 미리 너무 열심히 성취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학교에서 교외 활동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을 꼽으라 하면 자신 있게 나라고 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학 방면에서 내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영어 경시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고, 공인 성적도 취득하는데 힘썼다. 2학년 초에 ibt TOEFL 117점을 취득하고도 부족하다 느껴, 3학년이 되어 다시 토플 공부를 시작해 119점을 취득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제 2외국어로 처음 배우게 된 중국어도 짬짬이 공부해 높진 않지만 新HSK 4급을 취득해, 부 전공언어에 대한 관심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모의 유엔 활동은 내 고등학교 시절을 가득 채워준 소중한 경험이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동아리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모의유엔에 나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겁도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혼자 서울로 올라가 첫 모의유엔 대회에 참가하여 많은 자극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름 울산에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맞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2학년 때 학교 친구 두 명과 함께 3인 1조로 나간 Youth Model Summit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간절히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모의유엔에서의 활동에 탄력을 받아, 그 해 여름방학에 한국외대와 중앙일보가 동시 주최하는 Korea International Model Congress 2012에서 한국외대 총장상이라는 대상을 받는 영광을 얻었다. 2학년 2학기에는 고려대학교 모의유엔 의장직에 지원해 10주간의 의장 교육을 받으러 주말마다 서울에 다녀오는 엄청난 리스크도 감행했다. 주말 당일치기로 다녀오는데 들어간 노력과 시간이 엄청났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가진 지역적 장벽을 뛰어넘고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오기였던 것 같다. 결국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고, 공부 슬럼프도 겹쳐 성적이 하락세였던 시기였다. 하지만 잃은 만큼 얻은 것도 참 많았던 경험이었다. 멋진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이 가진 비전과 포부를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선배들을 통해 미래에 대한 동기 부여와 자극을 받은 소중한 시간이었으며, 5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를 내가 이끌어 나가고 방향을 잡는 데서 성취감과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나의 모의유엔 활동은 대회라는 점들이 이어져 결국 학생 논문의 형태인 하나의 선으로 완성되었다. 단순히 모의유엔 대회에 수 차례 참가하는 여타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나는 모의유엔에 참여하면서 직접 느꼈던 한계와 이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해 연구하고 싶었다. 지방 학생으로서 모의유엔 활동을 하며 느꼈던 정보 접근의 폐쇄성과 지역에 따른 한계를 파헤치고, 이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주최하는 국제 청소년 학술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for Youth, ICY) 본선에 진출하여 논문 발표를 하고 우수청소년학자상을 수상하였다. ICY와 같이 수준 높은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활동한 분야에서 일관성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학생들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지방 학생들의 모의유엔 활동에서의 어려움을 잘 반영하여 실상을 파헤치고, 이에 적절한 해결 방안을 도출해낸 스토리를 교수님들이 높이 사신것 같다. 내 고등학교 시절 빼놓을 수 없는 마지막 요소는 바로 합창 활동이다. 2학년이 되어 울산외고 합창부 Harmony의 부장이 된 나는3학년 선배들이 입시 준비에 바빠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60명이라는 많은 수의 신입 부원들을 충원해야 했다. 점심,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작년 활동 영상을 국제 회의실에서 보여주고, 쉬는 시간마다 홍보 포스터를 붙이면서 어렵게 부원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연습을 시작하였을 때, 나는 또 다른 난관을 마주해야 했다. 활동 시간이 따로 배정되지 않은 비공식 동아리의 부원들은 자발적으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연습을 해야 했지만, 하나 둘 핑계를 대며 연습에 빠지게 되자 정상적인 합창 연습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나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합창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았다. 개인의 바쁜 일정을 이해는 하나 연습량과 합창 수준에 대해 엄격해져야 하는 부장의 입장을 설명하며, 부원들과 함께 지역에 봉사하는 마음을 모아 설립한 합창부를 온전히 지켜나가자는 약속을 했다. 동기를 부여 받은 부원들은 파트 별 연습 일정을 만들어 단체 연습 시간은 줄이되 연습 강도를 높이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며, 합창부 연습 시 파트장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는 시스템을 마련하였고 음정을 잘 찾지 못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추가적으로 연습을 했다. 연습에 박차를 가한 결과, 합창부는 장애아동 봉사 공연에서 호평을 받았고, 학교폭력 힐링 콘서트에 초청받아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광역시 중고교생 합창대회에서 1위라는 영광을 얻었을 때, 나는 협동의 참된 기쁨과 함께 리더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 또한 빠지지 않고 연습에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솔선수범하는 리더의 책임감과 의무를 몸소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집단에서의 동기 부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대학 입시 준비는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다. 모의유엔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같이 토플 공부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일찍 ibt TOEFL 117점이라는 고득점이 나온 덕분일 것이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어학특기자 전형을 생각하게 되었고, 대외활동과 내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대입 준비에서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현 위치 및 장단점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지원 가능 학교를 파악하는 것이다. 비록 모의고사 성적이 좋았지만, 이보다 내신과 어학 성적 및 수상 실적을 종합하여 평가했을 때 나는 더욱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과감하게 수시에 전념한 케이스이다. 그래서 수시 최저등급이 없는 전형을 선택하게 되었고, 여기다 내가 지망하는 국제학부의 특성이 잘 어우러져 어렵지 않은 전형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서울대 일반 수시, 연세대 특기자, 고려대 국제인재, 성균관대 성균 인재 및 특기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화여대 특기자 전형을 지원하였다. 애초에 재수할 마음도 수능을 칠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수시 마지노선을 안전한 이화여대로 정했다. 가장 영어 특기자라고 할 수 있는 에세이 전형은 지원 자체를 하지 않았다. 서강대나 한국외대의 경우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보다는 순전히 에세이 실력으로 평가를 하기 때문에 굳이 지원하여 수시 카드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3학년이 되어 바빠지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오히려 3학년이 되어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워졌다. 수시 내신이 반영되는 3학년 1학기 내신을 최대한 향상하는데 성공한 후,바로 본격적으로 자기소개서 작성에 들어갔다. 약 서너 달에 걸쳐서 몇 십 번을 수정하고, 피드백을 받고, 다시 수정하는 반복적인 작업이었다. 그 동안 짬짬이 뉴스와 책을 통해 시사 상식을 습득하고, 이를 토대로 면접 준비를 했다. 2학기에는 주말마다 서울에 있는 학원에 등록해 면접 및 에세이 연습을 하고 내려오기도 했다. 증빙 서류까지 다 작성한 후, 나의 모든 것을 건 입시 지원 봉투를 제출할 때의 허탈하고도 뿌듯한 기분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끝나고, 가장 먼저 1차 합격생을 발표하는 연세대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은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치고 난 후에야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정말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수능 공부하는 친구들을 위해 혼자 화장실에서 핸드폰으로 연세대 홈페이지에 들어가 떨리는 마음으로 수험 번호를 쳤다. 우선선발이었다. 그때의 그 기분은 아직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테다. 면접을 보지 않고도 내가 연세대학교 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엄마 아빠께 전화를 드리고, 가만히 책상에 앉아 친구들이 건네는 축하의 말을 멍하게 받았던 것 같다. 이후 이화여대 1차 합격을 했지만, 이미 연세대학교에 합격한 상태라 면접에 참석하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면접을 간 학교는 고려대학교였다. 면접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에세이를 써내고 면접을 봤고, 그 결과는 최초합격이었다. 이어서 서류 100%로 선발하는 성균관대학교에서도 합격 소식을 전달받았고, 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사이의 고민은 등록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하루는 부모님께 고려대에 진학하겠다고 말해놓고, 그 다음날 일어나 연세대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하곤 했다. 둘 다 너무나 상이한 매력을 가진 학교고 학과였기에 결정은 더욱 힘들었다. 결국 나는 연세대학교 테크노아트학부에 등록을 마쳤다. 작은 학부인 고려대학교 국제학부에 비해, 연세대학교 테크노아트학부는 국제대학인 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 소속이었기 때문에 훨씬 폭넓은 교육을 기대할 수 있었고, 우수한 프로그램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느꼈다. 신설학과인 테크노아트학부는 이제 막 시작하는 학과이기 때문에 재학생들의 제안과 활동이 유연하게 받아들여질 기회와 제공되는 혜택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신 분도 있었다. 그분은 동문 네트워크는 대학원에서야 강력해지기 때문에 학부 때는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고 보시며, 본인의 성향을 감안하여 도전적인 환경에서 더 잘하는지, 아니면 안정적인 상황에서 보다 탁월해지는지 생각해보라고 조언해주셨다. 어떤 전공이 중요하다기 보다, 어떤 도전과 한계에 부딪히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학사 전공이 테크노아트이든 국제학부이든 차이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정말 많은 공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진학한 후, 중학생 때부터 겪었던 일들을 이렇게 수기로 쓰면서 많은 생각과 자기 반성을 하게 된다. 오히려 지금의 내가 안일하게 현실에 상주해 있지는 않나, 목표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며 어릴 적 나의 열성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빠져, 내가 한동안 근시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홀로 미국으로 발을 내디딜 때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자’라고 결심했던 그때의 나를 되찾아야지. 지금 내가 흘려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순간 순간을 터닝 포인트로 생각하고 소중히 다가오는 기회를 잡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