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이기는 자가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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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고등학교유학] 자신을 이기는 자가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다 (2)
미국대학입학 컨설턴트 안주영 워싱턴대학교 경영학과 천세원
새로운 미국생활, 그 좌절과 극복 (2) “거기 한국인 많아요?” 유학 오려는 후배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 중 하나다. 실제로 학교에 한국인이 많으면 영어를 덜 쓰게 되며, 한국이 더 그립고, 미국 학생들이랑 어울리지 못해 따돌림 당하는 예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나는 자신이 하기 나름이라고 본다. 내가 유학 중 운이 없었던 것 중 하나가, 내가 그 학교의 첫 한국인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고,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을 때 옆에 쉽게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한국인 선배가 있었다면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들 때 쩔쩔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깜짝 퀴즈가 수업시간에 가끔 튀어나온다는 사실도 미리 알았을 것이며, 국제학생들에겐 필수과목이 아닌 스페인어를 한 달 동안 공부하는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 학교 한국인 후배들은 내가 있었기에 미국생활에 대한 수많은 노하우들 물려받았고, 내가 가입했던 팀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흔히들 미국에 가면 무조건 영어만 써야 한다고들 생각하지만 나는 결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인끼리만 있을 때는 한국말을 쓰고, 미국인들과 같이 있을 때는 영어를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말을 쓸 때와 안 쓸 때를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면, 한국인이 옆에 있는 것이 오히려 타국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지생활에 빨리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다. 선후배끼리 도움을 주고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잃지 않고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 같이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교실에 태극기를 걸어놔 국기에 대한 경례도 조회시간 때 하였고, 월드컵과 동계 올림픽 때에는 다 같이 모여 큰 소리로 한국을 응원하였다. 그럴 때마다 유학하며 지친 나의 몸이 치료되었으며 뜨거운 애국심이 나도 모르게 솟구쳤다. 가끔 영어만을 하기 위해 한국인을 일부러 피하거나, 외국인들하고만 어울리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거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럴 경우 미국인이나 한국인 모두 그 행동에 대해 무례하게 생각한다. 한국인은 일부러 자신들을 피하니 교민사회에서 따돌림을 시키려 할 것이고, 미국인들은 자기 나라에도 존경심 없는 사람을 결코 존중하지 않는다.
유학생들에게 유학 중 가장 힘들었을 때를 물어보면 대부분 대학원서 제출할 때라고 답한다. 대부분 10개 내외의 대학을 지원하게 되는데, 대학마다 주제가 다른 에세이와 다양한 제출서류들을 학교공부를 병행하면서 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 또한 그러하였다. 내가 지원한 대학은 모두 11개로 에세이만 최소11개(추가에세이까지 모두 17개)였다. 평생 한 번도 써 보지도 않은 수필을 쓰려니 연필은 잡았지만,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고, 더군다나 학교 시험공부와 과외 활동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미국학교의 특성상 내가 둘이 있어도 힘들 정도였다. 날을 새는 것을 일상 시 하며 수업시간에도 수필에 대한 생각만 하였다. 한 번은 6시간 동안 에세이를 쓰다가 책상에서 잠들었는데, 날 배려한다고 호스트 엄마가 컴퓨터를 꺼주어 저장하지 않은 글이 다 삭제되어 망연자실한 경우도 있었다. 대학 원서를 제출하는 동안 나는 항상 피곤한 눈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생활했다.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기에 지금의 대학을 갈 수 있었나 싶다. 마지막 원서를 낼 때 온 몸이 풍선이 된 것처럼 가벼웠지만, 한편으로는 더 완벽하게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아쉬워 한 기억이 난다. 시험을 보고 나면 그 결과가 제일 궁금한 것처럼 원서를 쓰고 나니 결과에 대한 불안감으로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발표 기간이 가까워지자 새벽마다 메일을 열어 결과를 확인하였다.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의 합격소식을 유학원에서 들으니 “내가 기어코 해냈구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이 자리를 빌려 미국대학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 가지 조언하자면 평소에 수필 쓰는 연습을 절대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이다.
새로운 가족 호스트 식구들 미국생활에서 나의 가장 큰 행운은 친절하신 부모님과 사랑스럽고 귀여운 2살, 4살 터울의 두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호스트를 만난 것이다. 이들은 나의 2번째 가족이며 미국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적 정서로는 딸만 2명인 집에서 남자아이를 하숙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부모님에게도 불안한 일이었겠지만, 나 또한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족들의 믿음을 얻기 위해 나는 매사에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였고, 한국 집에서 생활했던 거와는 달리 모범적인 행동을 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였다. 그런 나를 1년 동안 유심히 지켜본 호스트 가족들은 완전히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었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처음 1년이 가족들과 친해지는 시간이었다면 2년째는 즐기는 시간이었다. 주말 밤마다 식탁에 모여 하는 카드게임, 아빠와 하는 탁구 내기, 가족들과 가는 수많은 여행 등 진짜 가족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 1년은 말 그대로 총알보다 더 빠르게 지나갔다. 가족들은 3년 동안 각자 나에게 큰 힘과 도움이 되어주었다. 아빠는 항상 무뚝뚝하지만, 내가 불이익을 당할 때가 있으면 제일 목소리를 높여주었으며, 내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할 때는 단호한 모습으로 나를 바로 잡아주셨다. 엄마는 해병출신이라 항상 나의 운동파트너가 되어주셨으며, 끊이지 않는 도전정신을 나에게 심어주셨다. 내가 주말마다 나무늘보처럼 놀고 있으면 항상 날 게으름뱅이라 놀리며 무언가를 하게 만드셨다.누이동생들은 나를 즐겁게 해준 동시에 화도 많이 나게 했다. 아침마다 학교 갈 준비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걸리는 지, 아침이 되면 난 동생들을 깨우기 바빴고 빨리 가자고 고함을 질러야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3년 동안 학교에 제시간에 도착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지금도 동생들과 통화할 때면 그 추억을 떠올리며 같이 웃곤 한다. 여동생이 없었던 나에게 그들은 귀여운 여동생들이 되어주었으며, 집안에서도 남자로서 예의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거울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함께 수도 없는 장난을 쳤는데, 한번은 내가 잘 때 내 옷마다 여자 향수를 뿌려놓아서 하루 동안 100여 벌을 세탁한 적도 있었다. 복수로 나는 헤어드라이어 속에 밀가루를 채워놓아서 샤워를 한 동생이 온 몸이 하얘져 나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미국을 떠나기 전까지 헤어드라이어 속을 항상 점검하게 되었다.) 인터넷 용어, 은어 등 학교에서는 쉽게 배울 수 없는 것들도 동생들에게서 배웠다. 미국에 온 지 3년째 되는 해 호스트 가족들과 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각자 이별의 준비를 하였던 것 같다. 작은 의견 차이에도 토라지거나 화를 내던 동생들은 웬만하면 져 주었고, 부모님도 나에게 더 잘해주시는 눈치였다. 졸업식 날 내 부모님은 기쁨의 미소를 지으셨지만, 호스트가족들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눈물을 흘렸다. 가족들의 사랑과 도움이 없었다면 미국에서 나의 생활은 속 빈 만두처럼 허전했을 것이다.
에필로그 3년 동안의 유학생활은 그 가치를 결코 매길 수 없을 만큼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9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만루 홈런을 쳤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공부보다 새로운 가족들,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문화, 그리고 수 없는 덕목과 인성을 가르쳐 준 3년의 생활이었다.유학 간 후에도 항상 연락을 해주셨던 유학원 선생님들, 날 항상 지지해주던 호스트 가족들, 그리고 유학을 허락해주신 부모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미국 워싱턴대학 입학을 목전에 둔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빌어 진심으로 나와 함께한 모든 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게 될 유학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인생에서의 경쟁상대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선배든 후배든 또한 친구든 그들은 자신의 삶의 동반자이지 결코 경쟁대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자만이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즐겨 읽곤 했다. 여러분은 두 갈래의 갈림길에 섰을 때 어떤 길을 선택 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갈 수도 있고, 소수의 몇 사람만이 걸어간 길을 따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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